3.2. 종교개혁운동을 알아보자! 3탄
서구 기독교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구원을 인간의 미덕과 업적으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대표적인 종교 개혁가인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교회가 이러한 정신과 반대로 가르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가톨릭교회는 행위와 업적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고 말이에요.
펠라기우스(왼쪽)와 아우구스티누스
사실 이 문제는 5세기부터 굉장히 오래도록 논란이 있었습니다.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가 만난 일인데요.
이 일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가종교가 되는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독교가 국가종교가 되자, 국가종교가 주는 혜택을 누리고자 너도나도 기독교인이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겉보기엔 기독교인이지만 도덕적으로 처참히 무너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늘어나게 되지요. 하지만 그들은 국가종교인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규범에 맞추어 살아가기 위해 율법주의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의 수도사인 펠라기우스가 로마에 왔다가 목격합니다. 그는 이러한 교회의 모습에 비통함을 느끼고 그들이 규범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닌, 좀 더 근본적으로 선한 행동을 이끌고자 합니다. 그래서 펠라기우스는 교회의 도덕 개혁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도덕적으로 온전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기에 이런 의지를 가지고 도덕적으로 살아갈 의무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전해질 수 있기에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의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펠라기우스의 주장이 기독교를 도덕 종교로 만든다며 열렬히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펠라기우스가 인간의 자유의지로 선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대해 인간에게 원죄가 있기에 자유의지를 선하게 쓸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주장을 '병(disease)'을 예로 들어서 설명합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병(원죄)이 들어서 자유의지를 선하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병이 걸리기 전에는 그럴 수 있었는데, 몸이 온전치 못하니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의사이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의지가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교회사를 볼 때, 행위와 믿음(또는 은혜)의 대립 구도는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루터도 앞서 소개해드린 펠라기우스 논쟁을 기억하면서, 루터 당시의 가톨릭교회가 펠라기우스처럼 행위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교개혁운동을 진행하면서 '이신칭의'(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음.)라는 슬로건을 걸고 활동합니다.
사실 '이신칭의'의 개념은 가톨릭교회 내에도 있던 개념이었습니다. 그들은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루터는 같은 개념을 '이신칭의'라고 바꾸어 사용한 것입니다. 바꾼 이유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지만, 무뎌진 용어를 바꾸어 부르면서 그 정신을 되살리길 바라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렇게 루터는 행위를 강조하는 가톨릭교회에 맞서 믿음을 강조했습니다.('Five Solae' 중 하나인, Sola Fide : 오직 믿음, 지난 포스팅 참고.)
이런 루터의 주장에 개혁가들의 평가도 양분되었습니다. 제네바의 개혁가 장 칼뱅(존 칼빈)은 이신칭의 교리를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스위스의 츠빙글리는 루터의 주장에 대해 기독교인의 선행을 향한 의지를 방해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급진 개혁가들이었던 재세례파도 이 주장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루터는 이런 반응에 대해 '선행에 관한 설교'에서 선행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에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감사의 행위이지, 구원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말합니다. 다시 말해 선행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루터였으니, 루터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고,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같은 서신이라고 낮추어 부르며 야고보서가 정경인 것을 못마땅해합니다.(정경 : 성경으로 인정된 책, 지금 성경에 있는 여러 책은 여러 문헌 중에 성경으로 정한 것들입니다.)
이어질 이야기가 길기에 다음 포스팅 분량조절을 위해서 오늘 포스팅은 여기서 멈춰야겠어요. 다음 포스팅은 종교개혁운동의 민주화적 성격에 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 만나요.
본 포스팅은 『알리스터 맥그라스 기독교의 역사』를 읽고 쓰는 글입니다. 부족한 내용은 여러 서적과 사전을 참고합니다.
포스팅 제목에 있는 번호는 본서의 챕터 번호입니다 :)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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