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마르틴 루터 형님의 종교개혁 3탄.
2017년 새해가 되었어요. 지난 포스팅에서 연말 인사도 드리지 못했는데, 벌써 새로운 해가 시작되어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도 열심히 교회사를 배워 봅시다! 계속해서 루터의 이야기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에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루터 형님에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할 좋은 기회가 생깁니다. 1518년 4월 25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독일 지역 총회였습니다. 95개조 반박문을 세상에 내놓은 이후로 가톨릭교회는 이 총회에 루터에 대한 압박을 주문합니다. 그래서 총회는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거나 수정하여 교황청의 가혹한 조치를 피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논쟁에서 루터는 면벌부 판매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콜라 신학에서 이어진 '영광의 신학'이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여 인간의 구원에 있어 행위를 강조한 당시 가톨릭교회를 비판합니다.
갑자기 면벌부 판매에서 '스콜라 신학'이니, '영광의 신학'이니 하는 용어가 등장해서 놀라셨을 수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문제입니다. 저번에, 우리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구원관을 살펴보았던 것 기억하세요?
2017/09/04 - [Topic 1 : Theology/1-1 Christian History] - 3.2. 종교개혁운동을 알아보자! 3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다뤄온 주제인 면벌부 판매가 어떤 것이었습니까? 죄를 범한 사람이 죄는 고해로 해결하고 남은 벌을 해결하기 위해 보속행위를 해야 하는데, 이를 사면해주는 증서잖아요. 그러니까, 가톨릭교회에서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어떠한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야고보서에 등장하는 것처럼 구원을 이루는 믿음에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따라오지만,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구원을 의도하고 인간이 행위를 통해, 그러니까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이루어 간다는 면에서 다르지요. 나중에 다시 살펴볼 테지만,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행위는 살아있는 진실한 믿음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구원이라는 보상을 바라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로주의적인 신학의 면모가 중세 스콜라 신학의 큰 줄기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영광의 신학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릴게요.
'영광의 신학' 명칭이 참 긍정적이고 아름답지 않나요? 제 지인은 저를 보고 '빛 덕후'라고 하는데, 저도 내용을 보기 전에 명칭만 보고 은혜를 받았어요. 하지만 루터는 이러한 신학적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합니다. 루터는 중세의 스콜라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 이유는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이성을 통해 사색하고 연구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학이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께서 하신 위엄과 능력들을 말해요. 중세의 스콜라 신학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부분들을 연구하며, 하나님을 알아가기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강하고 거대한 이미지와 당시 국교인 로마 가톨릭의 이미지가 비슷하지 않나요? 제국의 종교인 로마 가톨릭은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루터는 영광의 신학이 간과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그것을 '십자가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루터는 이렇게 강한 이미지를 주로 연구하고 국교의 막강함을 과시하던 가톨릭교회가 비참하고 연약해 보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다루는 데 소홀했다고 주장합니다. 더 큰 문제는 영광의 신학이 인간의 이성을 통해 사색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구원을 이루려 하므로 공로주의적인 색깔이 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법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십자가의 공로와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러한 주장을 15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피력한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에서 루터를 하이델베르크에 데려온 이유는 95개조 반박문과 면벌부에 관한 주장을 철회 또는 가톨릭교회에 맞게 수정한 주장을 하도록 하려던 것이었는데,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기는커녕 이런 주장을 펼친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스 루더는 아들을 잘 키운 것 같습니다.
하이델베르크 논쟁을 기념하는 기념물
하이델베르크 논쟁 이후에 교종(교황)은 루터를 로마로 소환합니다. 종교재판에 세우려 한 건데요.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비텐베르크 대학은 이에 반대하고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추기경 토마스 카예탄이 루터를 심문하도록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교종의 권위가 많이 약해졌다고 느끼시지 않으세요? 교종의 말인데 황제도 아니고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진, 선제후가 교종의 명령에 빠꾸를 놓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가 로마로 가게 되면 신변에 문제가 생길까 염려한 것입니다.
자 보세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토마스 카예탄 추기경은 루터를 위협합니다. 면벌부 발행은 교종의 승인을 받아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교종의 결정과 권위를 순순히 따르라는 것입니다. 하하. 이런 요구에 루터는 뭐라고 했을까요? 하하. 루터는 교종도 사람이기에 실수하고, 무엇보다 최종적인 권위는 성경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루터는 면벌부 판매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가져오라는 것이고, 근거가 없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자신은 주장을 굽힐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번복을 받아내지 못한 카예탄 추기경은 프리드리히 3세에게 루터를 그의 영지로부터 추방하거나 로마로 보내라는 편지를 보냅니다. 하하. 프리드리히는 어떻게 했을까요? 하하. 영지에서 추방이 되면 루터는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그러면 가톨릭교회는 루터를 수배하고 잡아 올 것이고, 로마로 보내져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자신의 영지에서 보호해 줍니다.
지금까지 마르틴 루터의 하이델베르크 논쟁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루터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 준 라이프치히 논쟁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기대해주세요.
본 포스팅은 『알리스터 맥그라스 기독교의 역사』를 읽고 쓰는 글입니다. 부족한 내용은 여러 서적과 사전을 참고합니다.
포스팅 제목에 있는 번호는 본서의 챕터 번호입니다 :)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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