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말 옆 기린 2023. 9. 6. 21:39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가까울 때
나는 아버지의 따스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어떤 분주함에 어깨가 한 껏 오른 날이면
당신은 저 깊은 심연에 계신 듯
당신을 찾는 나는 어두움을 느끼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그 깊음에 계신 당신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내 기다림은 짧고 당신의 부재는 길다합니다.

오늘은 어떤가요?
따스한 피아노 연주를 듣다가
문득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당신의 사랑을 닮은 소리에
문득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아버지, 여전히 어린 나는 감정에 기대어 당신을 만나려 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을 따라
당신의 표정을 바꿉니다.

당신의 철부지 아들은
당신의 얼굴에 손을 대어
자기의 감정대로
눈꼬리를 올리고
입꼬리를 내리고
코를 비틀어
당신의 인자한 얼굴에
결국 다시 못난 나의 기분을 그리고 있습니다.

지치게 하소서
결국 그 감정에 지치게 하소서
결국 당신의 얼굴에서 손을 놓을 때
변함없이 인자한 당신의 얼굴을 맞이하게 하소서

봄햇살처럼 내 심장을 꿰뚫던 당신의 사랑이 다시 내 존재를 비출 때
당신의 사랑을 닮은 환한 웃음을 당신께 돌려드리리다.

그간 나의 작은 숨이 아득히 먼 당신께 닿길 바란다 하였으나
나의 작은 믿음은 여전히 당신이 나의 작은 떨림에도 귀기울이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럼 당신이 요원하다는 고백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경솔함입니까
당신의 사랑을 의심하는 오만합입니까
당신의 인자하심을 남용한 기만입니까

아버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오직 아들로서 용납될 어리광이며
어렵지 않게 날 찾아낼 아버지를 믿는 믿음 안에서 시작한
어린 아들의 숨바꼭질입니다.

날 찾아내소서.
날 찾아내어 간지럽히소서
어린 아들이 숨이 멎을 듯 웃게 하소서
나의 기쁨으로 당신의 기쁨을 삼으소서.

변덕이 심한 아들이오나
그저 이 순간의 순전한 사랑을 받아주소서.

 

https://www.pinterest.co.kr/pin/814940495086707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