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말 옆 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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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ic 3 : Dear Chuch/3-1 Just Story

이야기

얼룩말 옆 기린 2017. 11. 25. 14:13

습작노트 - 스케치

(추후에 좀 더 다듬고 살을 붙여낼 생각입니다.)


1.

 그는 테이블에 차 키를 내려놓고 외투를 벗어 소파 등받이에 습관대로 접어 걸쳤다집이 어둑해졌지만, 그는 불을 켤 수가 없었다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벽에 기대앉아 얼굴을 쓸어 넘긴 손을 머리에 두고 눈을 감는 것뿐이었다.

 그는 불현듯 일어서서 차 키를 움켜쥐고 뛰어나갔다.

 피가 자욱한 부동산 사무실 소파와 테이블과 함께 두 사람이 피를 흘리고 널브러져 있다그들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그 남자는 칼을 밟았다.

 널브러진 두 사람의 피를 손으로 훑어 허겁지겁 얼굴과 옷에 발랐다차가운 피와 냄새는 이 순간이 모두 꿈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피가 흥건히 흐르는 손으로 칼을 쥐고 문을 열어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을 위협했다.

 이내 경찰이 도착했고 그는 칼을 떨구고 순순히 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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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차가운 겨울 한 남자가 집을 나서려고 했을 때대문 쪽에 놓인 바구니를 발견했다낯선 바구니의 크기나 그 본새를 보았을 때그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급히 대문을 열어 골목을 보았지만 고요할 뿐이었다.

 바구니를 앞에 두고 한동안 멍하니 있던 남자는 작게 흔들리기도 하는 바구니를 조심스레 안고 집으로 들어왔다. 

 식탁에 바구니를 올려두고 흰 담요를 걷었다까만 눈을 뜬 아이가 있었다.

 평범한 주말 오후 장을 보러 나가던 중에 생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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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치장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그는 생각했다아들을 처음 만났던 겨울눈을 처음 마주친 순간아들이 '아빠'를 처음 부른 순간씩씩하게 첫걸음을 내딛던 순간.

 환희의 순간들이 떠올랐다그 순간들이 찬란하면 찬란할수록 그의 슬픔을 더욱 깊어졌다단출한 두 식구는 모든 순간을 함께했다.

 함께 드라이브하면서 같이 휘파람 불었을 때와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가방을 벗어 던지고 자신을 찾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던 숨바꼭질도 아들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던 순간도 그때 불었던 바람과 기억 속 소리가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아픔은 더욱 날카롭게 그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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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침묵으로 모든 조사를 일관한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같은 방을 쓰는 동료 죄수는 모범수로 다른 죄수들과는 달랐다마치 학교에 반장과 같은 느낌이 드는 청년이다그와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그가 동향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모범수의 출소일은 얼마 남지 않았다.

 매일매일 죽음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느낌이 들더니 그 날밤,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아들이 빈집을 찾아갔다면 영문도 모르고 홀로 외로움을 느꼈으리라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짧은 이야기라도 남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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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들이 고등학교 진학을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그는 아이가 집과 가까운 학교로 가길 바랐다하지만 아들은 친한 친구들과 함께 기숙학교에 가겠다고 했다벌써 텅 빈 집에 홀로 있을 외로움이 그를 덮쳤지만 괜한 걱정으로 아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음에도 몰려오는 그리움을 모두 참아냈다그렇게 아들은 집과 조금 떨어진 기숙학교로 진학했다.

 일주일 내내 그리운 마음을 참아내다가 주말에 오는 아들을 위해 아들이 좋아하는 돼지고기가 들어간 김치찌개를 준비해놓고 기다리다가 벨 소리에 소파에서 튀어 올라 문을 열고 아들을 힘껏 안았다함께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러 가고 아들이 좋아하는 이성 친구의 이야기도 들었다. 

 이런 아들이 2학년이 되었을 때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주말이 되어도 집에 오지 않고 기숙사에서 보내는 날이 늘었다겨울 방학에는 교내 프로그램 때문에 방학에도 집에 올 수 없다고 했다. 

 방학이 끝나가던 어느 날, 그는 아들을 만나러 갔다그리고 아들이 말했던 교내 프로그램은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 이야기를 전해준 담임 선생님은 아들이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닌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는 복잡한 마음에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소파에 앉아 아들에게 전화하고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물었다그 프로그램이 어떤 프로그램인지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주절거리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걸기 전에 생각해둔 산더미 같던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잘 지내라는 말과 바르게 자라달라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아들은 3학년이 되었다주말마다 아들이 꼬박꼬박 오기 시작했다그동안 쓸데없는 걱정을 해왔다고 생각했다그의 마음은 평정을 찾았다

 다만 아들은 혼자만의 비밀이 많이 생긴 것 같았고 그와 오랫동안 함께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여름 방학이 되자 아들은 다시 교내 프로그램 이야기를 꺼냈다그는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아들은 막무가내였다전화도 받지 않았고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숙사를 찾아갔다아들의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그 중년의 여선생님은 나를 수상하게 쳐다보았다황당한 이야기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나는 다시 멍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학기 중에 아들이 보호자라는 남자와 함께 와서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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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는 문에 달린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보며 아들에게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

 모범수를 조심스럽게 깨웠다불안정한 호흡과 목소리를 들은 모범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일어나 앉았다그리고 그는 처음으로 자신과 아들의 이야기를 했다자신이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아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그와 관계를 끊은 이야기까지.

 모범수는 그가 추억들을 쏟아내면서 환희에 차올랐다가 그리움에 흐느끼는 것어느 순간에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과 함께 눈물을 흘려보내는 모든 행동을 눈여겨보았다모범수는 그가 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밤을 지새우며 쏟아 놓은 이야기들이 아침 해가 떠오르자 끝을 남겨두고 있었다평소 남의 일에 큰 신경을 쓰지 않던 모범수도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때문에 함께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 남자는 모범수에게 아들을 마지막으로 만난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다그리고 더 긴 침묵 속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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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모범수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그 남자가 사형집행일 아침까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그가 했던 무거운 부탁을 언제쯤 지킬 수 있을지.

 머지않아 전차가 환한 빛을 비추며 들어오고 있었다플랫폼 앞으로 한 발짝 나서는데 멀지 않게 떨어져 있는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안전선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모범수는 뒤돌아 있는 그의 뒤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열차가 다가오자 그가 오른쪽 발을 떼었다.

 모범수는 그의 목덜미를 잡아당겼고 주저앉아 그를 안고 사람들이 붐비는 플랫폼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모범수는 그 남자와 함께 걸었다그 남자는 모범수보다 좀 더 젊은 청년이었다그는 지낼 곳이 있지만, 그곳에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그 청년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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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앳된 청년은 자신이 고아라고 이야기했다그런데 자신이 어릴 적에 독신남에게 거두어졌고 그의 손에서 자라났다고 한다그의 기억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버지와 빚은 추억들을 말하는 동안 씁쓸하게 웃기도 했다아버지가 자전거를 뒤에서 잡아주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순간이 자신이 자전거를 홀로 처음 타던 순간이었다고아버지와 드라이브를 하면서 입술이 얼얼하고 머리가 띵할 정도로 휘파람을 불었다고이성을 처음 좋아하게 되었을 때 들었던 새로운 느낌들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 상황에 몰입했었는지 수줍은 미소마저 띠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풀어놓던 그 청년은 다시 고개를 떨구더니 표정이 바뀐 채로 이야기를 이어갔다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에게 이야기하고 아버지가 그를 격려해 주셨던 것들을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버지에게 갔다가 이내 눈물을 닦아내고 수줍게 웃어낼 수 있었던 순간들을항상 옆에 계시겠다고 하셨던 약속들을 하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모범수는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을 했다그래서 말했다아버지가 참 그립겠다고자식이기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모든 것이 후회로 돌아오기 마련이라고.

 청년은 자신이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아버지를 외롭게 두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기숙학교에서 나쁜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아버지와 거리를 두게 된 것아버지 몰래 학교를 그만두고 폭력조직에 들어간 것. 

 그러더니 청년의 얼굴엔 이전보다 더 짙은 어둠이 내렸다청년은 고향에서 두 사람을 죽였다고 했다그리고는 이곳 저곳을 떠돌며 지금도 도망을 다니고 있다고이제는 살인에 대한 죄책과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그럼에도 자수하기를 망설이는 복잡한 자신의 삶을 끝내려던 순간이었다고 했다.

 고개를 든 청년은 함께 걷고 있는 코 빨간 모범수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소리를 죽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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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모범수는 다시 그 남자의 사형집행일을 떠올렸다긴 침묵을 지키던 그는 일을 마치고 텅 빈 집으로 돌아오던 평범한 퇴근길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폭설 때문에 차가 밀리는 구간을 피하려고 인적이 드문 골목들을 비집고 다니다가 한 남자가 피투성이로 부동산을 나와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그 남자는 뛰는 모양만 보고도 아들인 것을 알았다고 했다그가 차에서 내려 따라갔지만 이내 눈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황망한 마음으로 상황을 목격한 그는 사건 현장으로 가서 자신이 범인인 것처럼 행세했다는 것이다그리고 어느 날 불쑥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을 기다린다고.

 그 남자는 모범수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다모범수는 그 남자를 마주 보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같은 동향이니 출소를 하게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만약 자기 아들을 만난다면 자신의 모든 사랑을 그에게 쏟아부었다고 전해달라고.

 그 날 아침엔 그 남자가 평소에 먹고 싶어 하던 돼지고기가 들어간 김치찌개가 나왔다.

 그 남자의 아들을 눈앞에 둔 모범수의 머릿속에 그의 떨리는 마지막 말이 우렁차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냥 이 아비가 많이 사랑한다고 전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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