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말 옆 기린

어느 날 욥기를 읽고 본문

Topic 2 : Book/2-1 Christian Books

어느 날 욥기를 읽고

얼룩말 옆 기린 2021. 4. 23. 22:29

레옹 보나의 작품(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C3%A9on_Bonnat_-_Job.jpg)

 5월 7일. 간염 의심 환자가 되어 격리 입원을 했다.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내게 찾아온 고통을 하나님과 연결하지 않았다. 간염의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을 바엔 처음부터 하나님과 연결 짓지 않는 것이 내 불의함을 조금이라도 감추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이 고통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고민하는 게 너무도 무모하다 생각했다. 스스로 의미를 찾았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진의인지 모를 일이며, 그렇게 찾아 놓은 의미를 갖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있을 바엔 그냥 말 그대로 ‘어쩌다가 걸렸구나’ 하며 휴식하는 게 편하겠다고 여겼다.
 병실에서 회복하는 동안 욥기를 단숨에 읽었다. 프롤로그를 읽으며 든 생각은 ‘저자가 왜 이러한 정보를 내게 주는가’였다. 정작 이 부분이 필요한 사람은 이것을 구걸하는 욥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욥에게 감추고, 욥의 고난과 고뇌를 만나게 될 독자에게 전말을 고한다. 어리둥절했다.
 또 욥이 맛본 어마어마한 고난이 이토록 시시콜콜한 대화에서 기인했다는 점이 너무도 충격이었다. 흠 없이 살고자 한 욥이 가벼운 대화에서 기인한 ‘동기 테스트’를 위해 그는 그토록 모진 고난을 받아내야만 했는가. 이 일은 의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언제든지 닥칠 수 있다. 고통의 양이 다르겠지만 어느 날 내게도 이러한 고난이 찾아올 것이다. 이미 겪은 고통은 지나갔어도 당장 내일 이처럼 가벼운 사건에서 기인한 테스트를 고통과 함께 맛볼 수 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다 해도 앞으로 맛볼 고통의 양을 줄일 수는 없다’고 생각할 즈음 내게도 그 순간이 찾아왔다. 오래도록 좋아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온 한 여인과 드디어 만나게 되었고, 짧은 만남 끝에 이유 모를 이별을 맞이하게 된 사건이다.
 하나님과 연결 지으려 하지 않았던 간염의 고통과는 달리 새로운 고통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묻고 호소하게 했다. 내 안에서 나오는 해명들로는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내 평생을 보시고 순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이 사건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와 만나던 순간 내 위에서 펼쳐진 프롤로그를 봐야 했다.
 욥과 친구들이 고발과 변론을 세 번(소발은 두 번) 주고받는다. 그런데 엘리후가 지적한 것처럼, 양측 모두 서로에게 조준해서 펀치를 날리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표적이 욥이긴 하지만 아닌 듯 하고, 상대가 고집스러운 생각을 고치길 바라면서도 그런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 허술한 대화를 보면서 이들이 서로 허공에 주먹질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엘리후가 나왔을 때, 얼마나 열광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연장자들이라고 모두 지혜롭지 않음을 발견했다며 패기 있게 등장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들과 같은 소리를 하고 사라진다.
 결국 이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한쪽은 욥이 불의하다며, 욥은 자신이 의롭다며 공방이 이어진다. 친구들은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고통을 주신다’는 명제를 욥에게 그대로 적용하고는 고집스럽게 욥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욥의 항복이 그들의 지혜가 옳았음을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고통과 그들의 명제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항변한다. 둘 중 한쪽, 또는 두 쪽 모두 어리석더라도 이들은 모두 욥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나도 욥에게 찾아왔던 손님들을 만났다. 이들은 내 안에 있었다. 새로운 고통을 해석하고 위로하는 여러 관점. 내 생각들이 욥의 친구들과 같았다. 그들은 이렇게 얘기했다. ‘네가 전도사여서 그래.’, ‘너는 그녀에게 부담을 주었어.’, ‘애초에 너랑 그 사람은 어울리지 않았어.’,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서 헤어진 일로 하나님께 설명을 구하는 건 너무 멍청한 일이야.’, ‘생각해봐, 지금도 이렇게 속을 끓이다가 헤어졌는데, 만남이 더 길었다면… 맙소사,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네 고통을 줄여주신 거야.’, ‘사랑에 눈이 먼 너가 그 잠깐 사이에 발견한 그녀의 단점이 이- 만큼이나 쌓였는데, 모두 다 덮고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을까?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걱정하지 마.’, ‘하나님께서는 네 짝으로 지혜로운 사람을 주시겠지만, 아름다운 사람은 주시지 않을 거야, 그런 네가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으니…’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긁었다.
 가까운 친구에게 이 짧은 만남에 대한 시작과 끝을 모두 털어놓았더니 그 친구는 결국 엘리후가 되었다. 애초에 욥처럼 흠 없는 삶을 살지 못한 나는 애도 기간도 지키지 않고 떠들어대는 이들의 말에 오래도록 끌려다녀야 했다.
 벌어진 사건에 대해 어떠한 확신도 없었기에 이들의 말에 욥처럼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내 어리석음으로 벌어진 일은 ‘욥기’라는 심오한 플롯과 안 어울리지 모른다. 그러나 고통의 이유를 모르는 욥과 이유 모를 이별을 통보받은 나는 비슷한 처지에 놓였고, 이처럼 고통스러운 상황이 부당하다고 호소하는 우리는 너무 닮았다.
 결국 나도 하나님께 이렇게 불평하고야 말았다. ‘하나님 제게 도대체 왜 그러세요?’
 하나님께서는 왜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고통으로 신음할 때 침묵하고 계신 것일까? 나는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무엇인가 말씀하고 계신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고 계시지만 고통 때문에 청력을 잃은 우리가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욥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침묵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욥을 만나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며 고통당하는 자의 반응을 살피고 계셨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의 목적이 ‘동기 테스트’인 것을 기억한다면, 하나님께서 관찰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욥의 고난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았을 그의 아내가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고 했지만, 그는 욥기 중반에 마음속으로 품어온 결심을 다시 한번 굳힌다. “내가 죽기 전엔 내 의로움을 버리지 않겠다!” 여러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그는 고통 중에도 흠 없는 사람이고자 바라고 있었다.
 그러면 온전한 반응은 무엇일까? 야고보는 고통 중에도 흠 없는 사람이고자 바란 욥의 반응을 보완해준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야고보는 욥의 인내를 들어 하나님께서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심을 믿고 인내하는 것이 고통에 대한 온전한 반응임을 알려준다. 이처럼 고통은 우리에게 적절한 반응을 요청한다. 하나님께서 고통까지 허락하시면서 우리의 반응을 보고자 하시는 이 순간은 아프지만, 하나님께 가장 정직하게, 너무 정직해서 처절함을 포장도 못 할 정도로 솔직한 반응을 드릴 소중한 기회이다.
 고통당하는 욥은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묻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의로움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욥을 길게 추궁하신다. 욥기를 읽는 동안 가장 고대하던 부분이어서 하나님의 등장과 말씀은 주제처럼 다가왔다. 한마디로 요약해 본다면, ‘욥, 나야 나 전능자, 나 못 믿어?’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지혜의 하나님께서 이유를 밝히지 않으시고 욥의 인생을 하나님 본인이 쥐고 있음을 밝히셨다. 고통으로 맘이 상하고, 친구들의 아픈 말을 견뎌온 가련한 욥에게 구구절절한 해명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이끄신다는 사실이 완전한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나 또한 이 부분에서 스스로 ‘욥은 다 받았구나’라고 읊조릴 정도로 만족했다.
 끝까지 욥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부분 때문에 욥기를 덮고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30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돌이켜 보면서 이런 결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 내가 겪은 모든 고통에 일일이 이유를 대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유 모를 고통이 더 많을 것이고, 몇몇은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탓’일 수 있다.
 따라서 불확실한 고통을 겪으며 사는 우리에게 욥기의 결론은 고통 중에서 전능자를 의지하라는 메시지를 더욱 선연하게 드러내 준다.
 이렇게 욥은 호소는 신원 되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곤경을 돌이키시고 갑절의 복을 주셨다. 고통은 지나갔고 이제 전능자께서 주신,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복을 누릴 수 있다. 그 모진 고통을 아시는 전능자께서 주신 합당한 복을 욥은 누릴 수 있다.
 나는 폭풍 중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만나 뵙진 못했지만, 고통 끝에 다다른 결론은 욥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삶을 쥐고 계신다.
 그녀와 관계를 시작하기 전부터 하나님과 이 관계에 대해 긴밀하게 묻고 의미를 찾아왔었다. 느끼고, 깨닫고, 성장하는 이 과정은 내게 큰 기쁨과 행복을 선물했다. 때문에 성숙의 장이 된 이 관계가 이유 모를 끝을 맞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를 양육하시고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면, 이제는 인정할 수 있다. 그래서 나와 그녀가 한 연인으로서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내 지혜를 내려놓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맡길 수 있다. 그러면 후에 나는 한 사람을 만날 것이다. 내 인내의 훈장인 아내, 이 믿음의 실상인 아내, 가보진 않았지만 믿음으로 이미 얻은 하나님 나라와 같은 내 아내. 그 나라보다 가깝지만, 지금은 그와 같이 멀리 있는 것 같은 내 아내를 만날 것이다.
 이러한 보상이라면, 욥이 받은 갑절의 복만큼 기쁘겠다. 어쩌면 그 관계 안에서 다른 고통을 감내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에도 전능자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올바른 반응으로 정직하게 그분 앞에 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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