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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말 옆 기린
3.1. 금년은 종교개혁 500주년! 종교개혁 배경 알아보기 2탄 본문
3.1. 금년은 종교개혁 500주년! 종교개혁 배경 알아보기 2탄
얼룩말 옆 기린 2017. 8. 13. 19:45우리는 저번 1탄에서 신흥 상인 계급의 등장으로 도시에서 귀족정치가 막을 내리고 시의회가 들어서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북유럽 국가의 도시들은 한 국가의 축소판 같았어요.
북유럽 국가의 도시들은 한 국가의 축소판 같았어요. 시의회가 정부의 역할을 맡고 시민들이 백성의 역할을 하는 그런 모양이에요. 또 이런 모습에 맞게 국가에서도 도시의 독립성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북유럽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어요. 특히 취리히에서 종교 개혁이 공중 토론을 거쳐 진행된 것을 보면 종교개혁에 시의회의 개입이 예상되는데요. 우리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사실 1탄에서 보았던 종교를 향한 사회의 불만은 비단 종교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회와 경제, 정치와 같은 시대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득권을 쥔 시의회는 사회, 경제, 정치처럼 자신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분야를 바꾸기보다는 교회를 개혁하는 것으로 시민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달래주기로 합니다.
그런데 사실 종교 개혁을 시도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천만한 도박 같은 것이었어요. 이게 성공할지 실패할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개혁을 감행해야 하는데 개혁을 시도하자마자 군사, 상거래, 정치적인 조약을 맺고 있던 주변 가톨릭 도시들과 자동으로 단절되기 때문이에요.
왜냐구요? 종교 개혁은 중세를 꽉 잡고 있던 가톨릭교회에 대한 문제점을 비판하고 대체로 등을 돌린 운동이에요. 이 운동을 한다는 것은 교회로부터 파문당할 각오가 되어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결단을 내린 도시들은 앞서 슬쩍 보았던 것처럼 시의회의 주도적인 개입을 통해 종교개혁을 진행합니다.
예를 들면, 취리히에서 활동한 종교 개혁가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개혁 운동을 더 빠르게 전개하고자 했지만, 시의회는 그보다 느린 속도로 개혁을 진행했습니다.
또, 스트라스부르에서 활동한 개혁가 마르틴 부처는 그 도시 안에서 행동에 제약을 받기도 합니다.
시의회는 종교 개혁뿐 아니라 종교 개혁가들까지 컨트롤 했으며, 개혁가들이 시의회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다면 도시에서 추방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도 들지요. 시의회가 다 할 거... 도대체 개혁가들은 왜 필요한 거야?
사실 종교 개혁가들은 개혁의 메인 아이디어를 제공했지요. 당시 불만에 차 있던 시민들에게 올바른 교회의 모양을 제시하고 "이런 모양을 향해서 나아가자!"라고 외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개혁가가 없이 도시가 개혁하자고 한다면 목자가 없는 양 떼가 우리를 탈출하는 것처럼 도시는 곧 전복되고 말 것입니다. 또 종교 개혁 운동 중에는 급진 재세례파와 같은 급진적인 개혁 운동이 있는데 이 또한 너무나 급진적이기 때문에 도시의 체제에 위협이 되었으며, 반대로 다시 가톨릭교회로 돌아가자는 보수적인 목소리도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극단의 성향을 균형 있게 잡아 건강한 종교 개혁을 이룰 개혁가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내부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1탄에서 교회의 상황을 외부에서 관찰했다면 이번엔 좀 더 교회 내부에서 살펴봅시다.
중세 말에 일어난 아비뇽 유수(사전 링크) 사건과 그로 인해 세 명의 교종(교황)이 동시 등장하면서 혼란을 겪은 교회는 완전히 새로운 교종을 선출하여 다시 단일 교종 체제로 혼란을 바로잡으려고 합니다. 이때, 새 교종을 공의회를 열어 선출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결사가 된 공의회는 교회의 권위를 놓고 교종과 공의회 중 누가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는지 논란을 야기했어요. 종교 개혁 시기에는 교회의 교리를 정하는 문제를 놓고 교리를 정하는 권위가 교종에게 있는지 공의회에 있는지를 놓고 싸우게 됩니다. 공의회에 이러한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공의회주의'라고 하는데요. 대표적인 종교 개혁가 독일의 마르틴 루터도 공의회주의자였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논문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에게'를 통해 교회 역사 중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신성 교리를 결정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한 것을 근거로 공의회우위를 주장합니다.
그의 저서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에게'에는 공의회우위에 대한 주장과 아울러 가톨릭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아주 조목조목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그 제목처럼 많은 귀족에게 읽혀 독자들의 마음에 개혁의 불씨를 놓았습니다.
마르틴 루터(1483-1546)
종교 개혁 시기 이전부터 교종과 공의회가 그 우위를 두고 싸우던 중에 공의회주의 운동이 실패하자 공의회주의자들은 교회 내부의 개혁을 포기하고 세속 권력의 힘을 빌려서라도 개혁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또 종교 개혁 시기, 이런 흐름을 따른 루터의 호소는 대중을 개혁에 대한 의지로 고취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큰 변화 중 하나는 교종의 힘이 약화하고 세속 통치자들의 힘이 강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단적인 예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한 사건(마리냐노 전투)을 들 수 있습니다. 1515년 9월 프랑수아 1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를 침공합니다. 그에 맞선 교종과 스위스의 연합군은 결국 패배했고 프랑수아 1세는 교종과 볼로냐 조약을 체결합니다.
프랑수아 1세는 볼로냐 조약으로 프랑스 고위 성직자의 서임권을 교종으로부터 가져왔는데, 이러한 변화로 교종은 프랑스 교회를 마음대로 손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수아 1세도 국가를 정통 신앙으로 뭉치게 하고 싶었기에 볼로냐 조약으로 획득한 통제권을 파리 대학교 신학부에 넘깁니다.
이후 프랑수아 1세는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교종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의 이혼 사건을 들 수 있어요. 헨리 8세는 죽은 형, 아서의 아내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을 하는데요. 이게 무슨 상황이냐 하면요. 에스파냐와 화친을 위해 그의 형 아서 왕자와 결혼하기로 되어있던 아라곤의 캐서린은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서가 죽자 과부가 되었어요. 그래서 부왕 헨리 7세는 캐서린을 죽은 아서 대신 동생인 헨리 8세와 결혼시키려고 합니다. 헨리가 결혼이 가능한 나이가 될 때까지 시간이 흐르고 보니 잉글랜드는 더이상 에스파냐와 동맹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헨리 8세는 캐서린과 사랑에 빠졌고 결국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헨리 8세는 캐서린의 시녀 앤 불린과 사랑에 빠지게 되어 캐서린과 이혼하려고 합니다.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의회를 거쳐 이혼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헨리는 교회의 정식적인 허락을 받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당시 에스파냐의 왕이었던 카를 5세(독일의 왕이 되고, 에스파냐의 왕이 되었다. 이후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 링크 연결)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와 있었는데, 이 카를 5세가 바로 캐서린의 조카였던 겁니다. 로마가 카를 5세에게 위협받는 상황에서 잉글랜드 왕은 눈치 없이 캐서린의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카를 5세의 심기를 더이상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교종에게 이런 요청은 당연히 받아들여질 리 없었죠.
이혼 허락을 받지 못한 헨리는 캐서린과의 결혼이 처음부터 성경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의회를 거쳐 교회의 승인 없이 이혼을 감행합니다. 이 일로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헨리 8세는 영국 내부의 독자적인 종교개혁을 이루게 됩니다.
카를 5세(1500-1558)
지금까지 종교 개혁의 배경을 살펴본 결과, 교회는 개혁을 갈망하는 목소리를 더이상 정치적으로 통제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통제권을 행사할 교종조차 신학적인 권위를 잃은 상태였지요.
이젠 개혁의 불을 진화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의 배경을 보니, 생각보다 여러 가지 요인들과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포스팅을 보시고 생기는 궁금한 점이나 다른 호기심들은 사전을 통해서 조사해 보시면 더 풍성해지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포스팅에서 만나요!
포스팅 제목에 있는 번호는 본서 『알리스터 맥그라스 기독교의 역사』의 챕터 번호입니다 :)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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